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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도 계급도 없는 비정규 비밀부대 "영도유격대"
6.25 전쟁 당시 북한 적진으로 침투해 게릴라전을 펼쳐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을 후방으로 이동시키게 한 비밀특수부대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영도유격대'라는 단어만이 군번과 계급장도 없이 오로지 구국의 일념 하나로 적지에서 적들과 싸우다 산화한 호국 영령들의 이름이다.
부산 영도 태종대에 본부와 훈련장을 둔 '영도유격대’는 6.25전쟁 발발 직후, 각종 공중·해상 침투로 황해·평안·함경 등 북한 전역을 누비며 북한군과 중공군 진지 습격, 지하조직 구축, 피란민 및 추락 조종사 구출, 무기 노획 등의 특수작전을 수행한 CIA 산하의 비밀 특수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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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쟁 발발 후 CIA는 미8군사령부와 적 후방 작전 지역을 구분해 맡았다. 미8군이 서해안을 맡는 대신 CIA는 동해안과 동북부 산악 지역을 담당했는데 당시 CIA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적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인종과 언어·지리미숙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현지사정에 밝은 함경·강원 일대 출신 실향민들로 편성한 이른바 'y부대'로 불리는 영도유격대를 1951년 3월 극비리에 창설했고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3~4개월 동안 특수훈련을 실시해 적진으로 침투시켜 북한의 병력을 분산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
1200명에 이르는 대원들은 태종대에서 야간훈련을 받으며 유격훈련장과 해상훈련장에서 전투훈련은 물론 낙하산 훈련ㆍ수중폭파 훈련도 받았다.
태종대는 일제강점기 일본 해군이 구축해 놓은 해안포대와 부대시설이 남아 있었고, 산림이 울창해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유격대 주둔지로 적격이었다. 유격부대가 주둔한 후 태종대는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된 유격기지가 된다. -
그러나 '영도유격대'는 정전 후에도 문서가 공개되지 않아 어느 기관 소속이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1968년 발행된 '비밀작전의 역사', '한국에서의 비밀전쟁'이란 CIA 극비문서가 2007년 공개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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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유격대는 휴전 직후 국방부 제8250부대로 통합되었다가 1954년 2월 육군부대 편입 후 창설 2년여 만에 해체됐다. 귀환대원 40명과 훈련 중인 200여 명이 제대했다. 770여 명의 호국 영령이 이름 모를 적진에서 산화했다. -
"우리는 전쟁 직후 월남한 반공 청년이 주를 이뤄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홀몸, 그 누구보다 북한 지리를 잘 아는 실향민 출신들이다” 라며 84세 백발의 노병은 영도유격대를 회상했다.
현재 영도유격대와 관련해 남아있는 기록은 매우 적다. 부대 해체 후 1953년 8월 하순 유격대 한철민 부대장이 전쟁 중 부대원 즉결처분 등으로 피소되는 사건이 발생, 관련자들이 사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작전 관계 서류를 불태우는 등 관리 소홀로 인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더욱이 부대가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와 연관되어 있지 않고 미군의 지휘 아래 군번과 계급도 없이 싸웠던 까닭에 유격부대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기타 정규부대에 비해 자료가 충분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부대원들의 이름들도 그나마 현재 몇 남지 않은 생존자들의 기억과 남아 있는 자료를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현재 故인이 된 한 영도유격대원은 몇 년 전 국방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기록이 유실됐다지만 찾아보면 관련된 사항들이 나오지 않겠어요. 이 나이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대한민국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공적만은 반드시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며 간절히 소망했다.
전쟁 후 65년이 지난 오늘날 태종대는 많은 이들이 찾는 유원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65여 년 전 그 곳에 '영도유격대'가 존재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이제라도 영도유격대를 비롯한 호국영웅을 알리는 프로젝트를 정치,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추진하여 군번과 계급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놓은 수많은 대원들의 명예를 하루 빨리 회복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