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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을사늑약 (1905년) 이후 영·호남 일대를 종횡무진하며 일제에 맞서 싸운 경남창의대 소속 의병장 박춘석(朴春碩 하동)·이백인(李伯仁 하동)·권인수(權仁壽 울산) 등 14인의 전사(戰史)가 향토사학자에 의해 광복 70년 만에 빛을 봤다.
정 소장은 “국가기록원 문건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4년 폭도수괴 조사표(1910년·경무국) 등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항일의병장 6인의 부대규모와 인적사항 그리고 활약상이 추가로 밝혀진 의병장 8인의 문건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춘석·이백인·권인수 등 14인 의병장은 산청출신 박동의 경남창의대 소속으로 지리산 일대인 하동·산청·함양·합천·거창·의령·함안·진주·구례·남원 등지에서 10∼150여명의 의병을 지휘하며 1910년 이후까지 무장투쟁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1910년 문건에서 밝혀진 것은 하동 박춘석(화개면)은 부하 20∼80명, 울산 권인수(울주군 언양읍 다개리) 부하 30∼100명, 하동 이백인(횡천면) 부하 10∼50명, 출신지 미상 김성구 부하 40∼150명, 前승지 이기선 부하 30∼100명, 前승지 이영칠 부하 30∼100명이다.
그리고 1908년까지 항일투쟁을 한 것으로 알려진 윤영수(윤승지·진주) 부하 30∼100명, 종경도(송경도·산청) 부하 30∼100명, 장세경(산청) 부하 30∼100명, 이백응(하동) 부하 10∼50명, 김대수(하동) 부하 10∼50명, 이주칠(진주) 부하 20∼80명, 조도인(진주) 부하 30∼100명, 이만구(사천) 부하 10∼50명으로, 1910년 이후까지도 항일투쟁을 벌인 것으로 이번 문건을 통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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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의병장은 1907년 8월 군대 강제해산과 고종이 퇴위되자 지리산 일대인 산청에서 박동의·윤영수 대장을 중심으로 1,000여명의 동지들과 경남창의대를 결성하고 이학로(경북영천)·박인환(박매지 하동)·권석도(함양)·조인환(산청) 등과 함께 영·호남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특히 14인의 의병장은 박동의 경남창의대장의 지휘 하에 1908년 3월 26일 산청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해 불태웠고, 4월 8일 합천우체국을 공격했으며, 같은 해 6월과 8월에는 남원 입석수비대와 하동수비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가했다.
1909년 2월과 6월에는 이학로(영천)·서병희(양산) 등과 함께 함안군 산외면 일본인 집과 함안 칠원경찰서를 습격했으며, 7월에는 진주 일대에서 박인환·권석도·이학로·하영옥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며 일제와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이학로·조인환 등과 함께 하동군 옥종면 월횡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조인환(산청) 등 13명이 전사했다.
정 소장은 이번 문건과 관련해 “일제는 1907∼1909년 의병진압을 위한 남한 토벌작전을 벌여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많은 의병을 사살·체포 또는 해산시켰다”며 “이로 인해 1910년 이후 의병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이번 기록에 나타난 의병장들은 한일병탄 이후까지도 지리산에 남아 유격전을 펼친 몇 안 되는 의병장”이라고 밝혔다. [사진=하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