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사랑해요' 부른 이정란, 24년 만의 첫 심경고백 ①
  • '추억의 가수' 이정란이 털어 놓은 방송 비화 <3회 연재>

    1984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가요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여성듀오 고은희-이정란은 이후 '사랑해요'라는 공전의 히트곡을 기록하며 80년대를 대표하는 대표 여성 듀엣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87년 콘서트를 끝으로 사실상 그룹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이들은 결혼과 솔로 가수 활동이라는 각자의 삶을 선택, 점차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 이들이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다름아닌 고은희의 아들로 알려진 데이비드 오 때문. 데이비드 오는 MBC '스타오디션 : 위대한 탄생'에 출연, 매혹적인 보이스와 탁월한 무대 매너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현재 '멘토스쿨'에 입학한 데이비드 오는 벌써부터 '제 2의 존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위대한 탄생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 미소년의 어머니가 바로 과거 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고은희인 것으로 밝혀져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작곡가 주영훈의 트위터로 인해 이같은 사실이 불거진 이후 대중의 시선은 이제 데이비드 오에서,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 있었던 황금 콤비 고은희-이정란에게로 향하고 있다.

    남편을 따라 훌쩍 미국을 떠난 고은희는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은행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정란은 공연기획사 '오감엔터컴'과 종합 이벤트 기획·대행사 '오감커뮤니케이션'의 대표를 겸임하는 전문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인기를 버리고 남편과의 사랑을 택한 고은희의 삶도 이채롭지만, 대중가수에서 찬양사역자로 방향을 튼 뒤 공연기획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이정란의 발자취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이정란은 향후 정치·문화·예술이 결합된 복합 서비스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게 꿈이라는데….

    세월을 훌쩍 넘어 가수 지망생과 평범한 어머니로, 은행원이자 공연기획사 CEO로 팬들 앞에 나선 이들의 이야기를 뉴데일리가 단독으로 취재,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다음은 이정란 오감엔터컴 대표와의 일문일답.

  • -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좀 부탁드릴께요.

    ▲이름은 이정란이구요. 1964년 음력 9월 5일생입니다.

    - 요즘 말로 초절정 동안이시군요. 사실상 가요계 원로급이신데…. 사실 이정란씨가 어떤 분인지 진짜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시절 라디오를 통해서 음악을 듣다보면 사계절 내내 고은희-이정란이 부른 '사랑해요'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는데요. 스타일은 올드하면서도 묘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매력이 일품이었죠. 그런데 정작 노래를 부른 사람들에 대해선 잘 소개가 안돼 있더라구요. 당시는 정보를 얻을 기회도 적었고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죠. 다만 고은희씨는 나중에 이문세씨와 함께 부른 '이별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 음악 활동을 해왔는데요. 워낙 조용하게 하다보니 대중들이 알 기회가 적었겠죠. 고은희-이정란 앨범을 낸 뒤로 솔로 활동을 몇 년 하다가 93년부터 CCM(기독교 대중음악)의 길로 접어 들었었죠. '뜻밖의 손님'이라는 이름의 혼성 4인조 CCM밴드로 활동했었는데, 당시엔 파격적인 'CCM 락밴드'를 표방했습니다. 그때엔 CCM이란 장르도 생소했고 더욱이 찬송을 락으로 표현한다는 게 충격적이었죠.

    - 주기도문을 락으로 부르셨다는 말도 있던데….

    ▲네, 저희가 그렇게 표현했었죠. 당시 젊은층에서 굉장히 신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최인혁, 송정미, 좋은씨앗, 소리엘 등과 함께 다니며 친분을 유지했었는데요. 최인혁씨가 먼저 나오고 후배인 소리엘을 한창 키우고 있을 때 저희도 활동을 했었죠. 그런데 저희는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달랐죠. 그쪽은 교회에서 훈련도 받고 나름대로 사명을 가지고 사역자로 들어온 것이고 저희는 가요계에서 활동하다 우연히 CBS 피디를 만나 기독교 음악을 하게 된 케이스입니다.

    "'사랑해요' 발표 후 CCM으로 장르 전환"

    - 장르를 전환한 이후 앨범을 내신 적은 없었나요?

    ▲93년 무렵 CBS 한용길 피디가 "CCM이란 장르가 있다. 기존 가수 중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취합해서 앨범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저에게 했습니다. 이 제안을 제가 받아들여서 '빛으로 모두 함께'라는 CCM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기획·제작은 전적으로 한용길 피디가 담당했구요. 저희를 비롯해 박학기, 김도균, 김목경, 한동준씨 등이 앨범 작업에 동참했었죠.

  • -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분들이 한 자리에 모였었군요. 그런데 단발로 끝나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93년도인데요. '아! 이렇게 기독교 음악도 할 수 있구나'란 일종의 깨달음을 얻게 됐는데요. 당시 효성음반이라는 곳에서 "음악을 들어봤더니 느낌이 괜찮았다"며 "한번 독집을 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저희는 사역이 뭔지, CCM이 뭔지 잘 몰랐지만 '이렇게 내 신앙을 이런 스타일로 표현해도 되는구나'하는 생각에 너무 좋았죠. 그래서 사역자의 접근이 아니라 음악하는 사람으로 접근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CCM은 사역자의 마인드가 먼저고, 거기에 음악이 플러스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런 문제들로 내면적인 갈등이 좀 있었지만 아직도 그런 기회로 CCM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은희씨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원래 교회에서 만난 사이에요. 어릴 적부터 신촌 성결교회를 같이 다녔었는데 고은희씨가 한 학년 위였기 때문에 줄곧 언니라고 불러왔죠. 그런데 나중에 같은 64년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가 홍익대학교에 입학해 '뚜라미'라는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은희 언니가 서울여대를 갔다가 다시 이 학교로 옮겨와 서클 활동을 같이 하게 된 거예요. 대학교는 동기 동창이 됐지만 저는 계속 언니라고 불렀죠.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 고은희씨는 혹시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오래 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후 그곳에 정착한 상태인데요. 현지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업은 은행원이구요. 남편도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시부모님들은 더 대단해 아프리카 선교까지 다녀오신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은희 언니는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로 음악을 못하는 상황이 됐고 저는 다행히 음악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 솔로 활동을 병행하다 나중에 기독교 방송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앨범을 내게 된 것이죠.

  • "고은희-이정란 대학가요제 동상 수상 사실아냐"

    - 84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동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저희 팀이 동상을 받았다고 보도한 것 같은데 사실과 다릅니다. 저희는 입상만 했을 뿐 본선 무대에서 대상이나 금·은·동상을 타는 영예는 누리지 못했어요. 3차까지 올라가면 본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건 엄연한 본선 입상이지, 수상과는 거리가 멀죠. 그런데 인터넷에 저희가 동상을 받은 것처럼 돼 있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었죠.

    - 그럼 수상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앨범을 내게 됐나요?

    ▲나중에 앨범 발매를 바로 할 수 있도록 본선 진출자들은 대학가요제 본선 무대가 열리기 전, 미리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을 다 했어요. 당시 우리가 녹음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음반사 부장님이 대학가요제가 끝난 뒤에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한 것이죠.

  • - 첫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자작곡들인가요?

    ▲동아리 '뚜라미' 곡 중 열 몇 곡을 추려서 앨범으로 만든 거예요. 저희가 직접 만든 노래들은 아니고 대부분 선배님이나 동기들 곡, 아니면 우리가 좋아서 불렀던 곡들을 선정했죠. 예전엔 대학교 축제가 있으면 음악하는 동아리들이 서로 와서 점심값만 받고 노래를 불러주곤 했는데요. 당시에 반응이 좋았었던 레파토리를 골라 앨범으로 꾸민겁니다.

    - 그렇다면 고은희-이정란이 아닌 '뚜라미'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냈어야 하는게 맞지 않나요?

    ▲선배님들이 '뚜라미'는 동아리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게 내면 안된다고 말씀하셔서 '고은희-이정란'이란 실명으로 앨범을 낸 거죠. 만약 다른 이름으로 앨범을 냈으면 2,3집까지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별 생각이 없었어요. 고은희란 이름이 먼저 배치된 건, 저보다 언니이기도 했고, 자금이 'ㄱ'이라 "그냥 고은희-이정란으로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거죠.

    - 활동 당시에 방송 출연을 거의 안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고집이나 철학이 있으셨나요?

    ▲사실 앨범이 나오는 날 은희 언니가 노래를 못하겠다고 했어요. 레코드 회사에서 우리 앨범이 나왔으니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순간 폭탄 선언을 한 거죠. 그때가 85년도인데요. 저 역시 언니가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을 알기 때문에 너무 속상했죠. 회사 측도 마찬가지구요. 당시 언니가 결혼하기 전 시댁에서 연예 활동이나 노래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앨범을 내면 방송 출연도 해야되고 홍보 활동을 해야 되는데 언니가 그럴 자신이 없다고 한발 뒤로 물러선 거죠. 본인이 워낙 조심하는 스타일이라…. 저도 그 당시 연애 중이었지만 다행히 음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활동하는데 제약은 없었어요.

    "앨범 나오는 날 '음악 못하겠다' 폭탄 선언"

  • - 앨범이 인기를 얻었다면 여러 음악 프로그램으로부터 섭외 요청이 많았을텐데 다 거절하신건가요?

    ▲글쎄요. 애초부터 우리가 회사 측에 홍보 활동을 못하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섭외 요청이 들어왔어도 레코드사에서 사양을 했던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이문세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는 왜 출연하신거죠?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왔을 때에는 은희 언니의 (지금의)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언니 혼자 남아 있었고, 남편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어요.

    원래 저희가 가수 활동은 못한다고 말을 해왔지만 곡이 점차 알려지면서 "'사랑해요'라는 노래를 부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리퀘스트가 방송국에 빗발쳤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별이 빛나는 밤에'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마침 언니가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져 "한번 가보자"는 얘기가 나온 거죠.

    - 훗날 고은희씨는 이문세씨와 '이별이야기'를 함께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는데요. 이문세씨가 고은희씨와 노래를 부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당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이문세씨와 친분을 쌓게 됐는데요. 먼저 우리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진심으로 말씀해주셔서 저희 역시 쉽게 다가갈 수 있었죠. 그리고 '이별이야기'의 듀엣 제의는 저에게 먼저 들어왔었어요. 하루는 이문세씨가 저에게 "이 곡을 함께 불러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더군요. 당시 은희 언니는 결혼 문제로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지 않았고 저만 지구레코드에 계약된 상태였어요. '고은희-이정란'이란 팀은 있었지만 사실상 저 혼자 솔로 가수 활동을 하는 셈이었죠. 그래서 이문세씨의 제안을 듣고 회사에 물어봤더니 듀엣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몰랐지만 제가 전속계약가수이기 때문에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죠. 그래서 이문세씨에게 "차라리 언니와 해라. 언니는 아무런 계약 관계가 없으니 가능할 것 같다"는 말을 했고 언니 역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결국 언니가 녹음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고 '이별이야기'를 부른 데모 테이프까지 나오게 됐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