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승만, 박정희는 세기적 지도자인가?
  •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李承晩, 트루먼, 朴正熙의 位相: 세 恩人의 동상이 서는 날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바로 선다.


 '李承晩의 反共자유민주의 建國, 트루먼의 미군 파병 결단, 朴正熙의 조국 근대화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와 복지와 안전은 없다. 세 위인들은 한국을 자유세계의 방파제로 삼아 공산전체주의 체제를 무너뜨렸으니 가히 인류의 공존공영에 이바지 한 세계사적 대인물이다. 세 분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살아남아 행복해진 이들의 후세에 대한 교육적 의무이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자랑이다.'    

 한국 現代史는 인류 최고의 업적

 1945년 이후의 대한민국 現代史(현대사)를 우리는 ‘피·땀·눈물로 이룬 세계사의 金字塔(금자탑)’이라 부른다. 이 금자탑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도 되지 않아 일어난 한국전의 屍山血海 속에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월남전을 종군 취재,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은 전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핼버스탐은 《가장 추운 겨울》이란 제목의 著書(저서)에서 한국의 戰後(전후) 발전은 마셜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과 일본의 근대화보다 더 위대한 업적이라고 극찬하였다. 
 오바마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한국전쟁은 무승부가 아니고 승리한 전쟁이며, 冷戰(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이긴 것은 한반도에서 韓美軍(한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한 덕분이다”고 자랑한다. 한국전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세계사적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기습을 받은 국군이 버티고,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군이 참전하고, 다른 유엔 회원국들이 가세하고, 자유진영이 결속한 덕분에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 합작한 비열한 침략전쟁은 역효과를 불렀다. 
 한국이 살고, 대만이 지켜졌으며,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고, 서독이 재무장하였으며, NATO가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다. 트루먼은 미국의 국방비를 세 배로 늘려 본격적인 對蘇(대소) 군비경쟁에 들어갔고 그 40년 뒤 소련이 무너진 것이다. 對蘇포위망을 완성시킨 계기가 김일성의 기습남침이었으니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은 자신들의 무덤을 판 것이다. 韓美軍을 비롯한 수백만의 자유민이 한반도에서 흘린 피가 수십 억 人類(인류)에 자유와 번영을 선물한 셈이다.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희생을 기억하고 은인들과 대화하며 감사하는 매개체가 동상이다. 

 세계시민의 공동 작품

 역사에 남고 동상으로 기억되는 대인물은 전쟁이나 혁명의 무대를 통하여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李承晩, 트루먼, 朴正熙가 세계적 인물이 된 데도 한국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승만, 트루먼은 세계적 전쟁의 兩大 지도자였다. 두 사람은 이 전쟁이 한국과 미국만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인권 수호를 위한 거룩한 싸움이란 확신을 처음부터 공유하였다. 
 한국전을 통하여 성장한 국군과 장교단이 朴正熙(박정희) 장군의 지휘 하에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아 근대화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경제발전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의 근대화는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었고, 중국, 말레이시아 등 後發(후발) 국가들이 따라 배우는 모범 사례가 되었다. 韓國戰의 승리가 수십억 인류를 안전하게 만들었듯이 가난과 戰亂(전란)을 극복한 한국의 근대화 모델도 수많은 인류를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피로 이룬 韓國戰 승리, 땀으로 성공한 산업화, 눈물로 세운 민주화, 그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는 피·땀·눈물의 세계사적 금자탑이다. 피, 땀, 눈물엔 그러나 서열이 있을 것이다. 피>땀>눈물이 아닐까? 이 금자탑은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만든 것이요, 트루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의 결정적 도움이 있었으니 세계시민들의 공동작품이기도 하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이 객관적 사실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뽑아내야 마땅하다. 한민족의 세 恩人 이승만, 트루먼, 박정희의 동상, 거리 이름, 그리고 얼굴이 들어간 화폐가 나와야 국가의 정체성이 구체화될 것이다. 광화문 광장이나 용산 전쟁기념관에 세 분의 동상을 세워야 우리는 ‘世界史의 금자탑’을 국내외에 자랑하고 後世(후세)를 자랑스러운 국민으로 교육할 수 있다. 좋은 일을 해놓고도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세 恩人의 노고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한국인은 당당한 주인의식을 가진 자유민이어야지 열등감이나 분열의식, 또는 사대주의에 찌든 머슴일 순 없는 것이다. 이승만, 트루먼, 박정희 동상을 세우는 날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신이 세계 속에서 바로 서는 날이다.  

 20세기의 12대 지도자

 몇 년 전 점심 식사 시간에 재미있는 토론이 있었다. 한 기업인이 리더십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한 세계적 인물들을 12명 골라 그들의 사진을 담은 달력을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라고 하였다. 예술가, 군인에 이어 내년 달력은 정치인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20, 21세기에 한정하여 세계사의 발전에 기여한 12명의 지도자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同席(동석)한 4명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갔다. 정리하면 이렇다. 
   
 1. 선정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共同善(공동선)에 기여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히틀러, 레닌, 스탈린, 체 게바라, 毛澤東(모택동) 같은 독재자나 혁명가들은 탈락된다. 이들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기준으론 그 지도자가 통치했던 나라가 큰 나라이거나 선진국이어야 한다는 데 일치하였다. 
 3. 세 번째 기준으로는 그 지도자가 물러나거나 죽은 뒤 그의 정치적 유산(이념, 제도, 노선 등)이 계승되어 그로 해서 나라가 발전했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고슬라비아를 공산국가 중 가장 먼저 개방시켰고, 스탈린과 맞서 독자노선을 걸었던 티토는 이 기준에 걸려 탈락했다. 그의 死後(사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內戰(내전)과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티토의 노선이 후계자들에 의하여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후계자의 成敗(성패)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4. 네 번째 기준으론 建國(건국), 獨立(독립), 전쟁, 中興(중흥)의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평화 시의 지도자보다는 아무래도 亂世(난세)의 지도자가 돋보인다.
   
 정치적 결과물을 먼저 살펴 본 다음 그 주인공들을 선정하기로 하였다. 정치에선 動機(동기)보단 결과이다. 문학이나 사회운동에선 動機가 중요할지 모르나 정치는 어디까지나 결과로 평가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서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먼저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는 4選을 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주도했다. 해리 트루먼. 그는 東西 냉전에서 자유세계가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놓았고 전략의 기본 방향을 잘 잡았다. 원폭 투하, NATO 창설, 마셜플랜 추진, 트루먼 닥트린, 한국전 참전 등 큼직한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로널드 레이건. 그는 소련 공산제국을 해체로 몰고 간 인물이다. 총 한 방 안 쏘고 惡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영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홀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맞서 자유세계의 보루를 지켜냈던 윈스턴 처칠, 그리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성공시킨 마가렛 대처 여사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

 * 프랑스에선? 두 말할 것도 없이 드골 대통령이다. 독일군의 전격작전으로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하자 망명정부를 세워 저항을 계속했고, 그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땐 프랑스가 勝戰國(승전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10년간 은퇴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위기에 처하여 그를 다시 불러내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여 5공화국을 10년간 통치하면서 고질적인 정치 불안을 제도적으로 종식시켰다. 오늘의 프랑스는 드골이 중흥시킨 나라이다.

 *독일에선? 戰後(전후) 독일의 부흥을 주도했던 아데나워, 또는 독일통일의 기관차 콜 수상 중 한 명이면 오케이!

 *일본에선? 戰後 일본을 親서방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킨 일본 중흥의 기수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외의 인물이 있을 수 없다.

 *중국에선? 모택동은 魔王(마왕)이니 젖혀놓는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혁 개방의 흐름을 만든 鄧小平(등소평)일 수밖에 없다.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급성장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주의적 정치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혼합한 鄧小平 노선의 승리이다. 
   
 *머지않아 세계최대 인구국이 될 인도는? 간디는 정치 지도자로 볼 수 없으므로 제외한다면 인도 독립과 建國의 지도자 네루이다. 가난하고 복잡한 인도를 그래도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나라로 만들어 끌고 간 공로는 대단하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 여사 암살, 그의 아들 암살, 종교분쟁 등등 소란스럽기는 해도 민주주의식으로 굴러간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이다. 
   
 *동남아에선? 월남의 지도자 胡志明(호지명)을 거론한 이도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는 점에서 失格(실격)되었다. 더구나 통일된 월남은 지금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자본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수하르토를 꼽을 순 없다. 부패한 독재자였고 지금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모범적이지 않다. 
   
 *南美(남미)에선? 달력에 넣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세계 5대 富國(부국)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를 포퓰리즘으로 망친 페론을 넣을 수도 없다. 칠레가 가장 잘 나가는 나라이지만 수천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곤란하다. 공산 혁명가 카스트로나 선동가 차베스를 모범으로 삼을 순 없다. 
 
 *아프리카에선? 한 사람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언급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어 중동의 불씨 하나를 껐다. 그 代價(대가)는 암살이었다. 그런 점에선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지금 이집트의 상황이 말이 아니다. 사다트를 이은 무바라크가 30년을 지배하였지만, 이집트는 민주화도, 산업화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아랍의 봄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독재를 오래 했으면 경제라도 발전시켜야 할 것 아닌가?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있다. 남아프리카는 흑인 통치로 넘어간 후 살인사건이 너무 많이 난다. 이 부분에서 세계 1등이다. 그럼에도 만델라의 도덕적 지도력이 白人(백인) 지배를 큰 유혈사태 없이 끝장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스라엘? 단연 건국의 아버지 밴 구리온이다. 문제는 아랍 세력과 저렇게 싸우는 이스라엘 지도자를 영원히 기려야 할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가이다. 
  
 *대만? 본토에서 쫓겨나 이 섬으로 건너온 蔣介石(장개석)과 그 후계자들이 모범적인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일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래도 모택동에게 져서 본토를 빼앗긴 인물을 師表(사표)로 내 세울 순 없다.

 *이슬람圈(권)의 대표 선수는 누구인가. 터키공화국을 거의 혼자서 세운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를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키 제국은 해체되고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케말 파샤 장군이 군대를 모으고 그리스를 밀어내고 오늘의 터키를 세웠다. 그는 이슬람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을 했다. 政敎(정교)분리, 여성 참정권 허용, 문자개혁 등. 터키 군부는 이런 케말 파샤의 노선을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지만 최근 이슬람 세력의 견제를 받아 약화되고 政情(정정)도 불안해졌다.  
  
 *한국에서도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 물론이다. 한국의 국력이 세계 10위권이므로 당연히 대표인물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20세기에 국민국가로 출범한 여러 나라들 중 한국이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점에선 異論(이론)이 없다. 그렇다면 이 한국의 기적적 발전을 만든 지도자가 12명 안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발전모델은 후진국과 開途國(개도국)의 참고서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독립과 건국의 李承晩인가,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인가? 두 사람은 거의 同級(동급)이다.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는? 한 분이 추천했다. 토론을 해보니 탈락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싱가포르의 규모가 작다. 민주화도 안 되어 있다. 한국처럼 후진국과 개도국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보편성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누가 대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레닌, 스탈린은 자격 박탈이니 고르바초프가 남았다. 그는 소련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惡(악)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니 인류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다고 달력에 넣어 지도력의 모범으로 기려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고르바초프에게 상을 줄 사람은 하나님뿐일 것이다.

 *내가 멋대로 달력에 넣을 세계적 지도자 12명을 결정한다면 이렇다. 李承晩, 프랭클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두 명이 모자란다. 아무래도 이 달력을 보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한 명을 더한다. 朴正熙! 그래도 한 명이 모자란다. 미국에 한 자리를 더 주기로 한다. 한국을 두 번 살린 트루먼! 내가 너무 情(정)에 약한 것일까?

 한국전의 재인식에서 출발해야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더타임스> 등 여러 언론기관에 기사를 쓰는 앤드루 새먼 기자는 英聯邦(영연방) 글로스터大隊(대대)의 決死抗戰(결사항전)을 다룬 《마지막 한 발까지》라는 책을 썼다. 그는, 1951년 4월 하순 중공군의 대공세로 포위당한 영연방軍의 영웅적 전투(설마리 전투)를 취재하며 여러 생존 참전자들을 만났다. 상당수는 전란 중의 한국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다시 찾은 참전자들은 달라졌다.  
  책의 한 대목이다.   
 〈그들은 새롭고, 용감한 나라 한국을 발견한 것이다. 유엔군이 흘린 피값은 미국의 돈으로 보증되고 한국인의 땀으로 상환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무역과 기술이전에 특혜를 받은 데다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고, 유일한 자원이자 발전의 지렛대인 사람에 투자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올림픽을 열기 전해엔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민주화까지 이뤘다. 오늘의 한국이 누리는 생활수준과 개인의 자유는 유럽의 중급 정도가 된다.〉  
  2001년 글로스터 대대 전투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참전자 일행은 전쟁기념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의장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 환영 행사에 잘못 온 게 아닌가’하는 착각을 했다고 한다. 한 참전자는 “한국이 이런 나라가 되다니, 하느님, 맙소사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허리띠가 고장 나서 상점에 들어갔더니 주인은 새 허리띠를 주면서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싸웠잖아요. 작은 선물입니다.”> 
  새먼 기자는 ‘zero to hero’란 표현을 쓰면서 한국처럼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그야말로 제로 상태에서 일어나 영웅적 나라를 만든 것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국가적 성공 사례라고 주장했다. 헨리 울프스라는 영국군 참전자는 이 책(《마지막 한 발까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본다면 자유가 공짜가 아니란 말이 맞다. 반세기가 흘러서 뒤돌아보니 ‘잊혀진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존 프레스턴 벨 씨는 著者(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의 공통점이 뭘까요?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거예요. 50년 전 나는 내 생명의 1년을 주었습니다.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지요.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준 그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감사를 받고는, 그리고 그들이 만든 완전히 새롭고 멋진, 유쾌한, 평등하고, 야심만만하며, 번영하는 새 나라를 만든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이는 당신들입니다.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키워 준 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새먼 기자는 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저서를 끝냈다.  
    
  韓國戰 계기로 對蘇 포위망 완성
  
  미국 국방부가 발간한 《전쟁의 시련(1950~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 이 책에는 미국이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가 담겨 있다.  
  미국 정부는 왜 한국전을 냉전 승리의 시작으로 보는가? 미 국방부 장관실 公刊史(공간사)인 《전쟁의 시련(1950~53)-The Test of War, History of the Office of the Secretary of Defense》은 결론 부분에서 한국전이 세계사의 흐름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전은 20세기 후반의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만하다. 세계를 두 무장(武裝) 진영으로 나눈 점,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막는 데 있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의 증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장기 주둔, 거대해진 미국의 軍産(군산)복합체-이런 현상들은 한국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강화되었다. 전쟁기간(1950~53)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지도자의 역할을 완벽히 떠맡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의 NATO 盟邦(맹방)들을 지키는 데 최고의 우선순위를 뒀다. 한국전은, 늘어가는 소련의 핵무기 在庫(재고)에 대응해 미국이 핵무기 제조와 운반 수단(폭격기, 미사일,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평화 時에도 외국과 군사동맹(NATO)을 유지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외교 정책이었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유럽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증폭시켜 NATO 회원국들로 하여금 통합 지휘체제를 구성하고 더 많은 군사력과 자원을 이 동맹에 제공하도록 만든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사주한 김일성의 남침과 중공군의 개입을 역이용, 소련을 봉쇄하는 전략을 완성하고 본격적으로 군비경쟁을 시작한다.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미국은 일본,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한국과 상호방위 조약을 맺게 되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地上軍(지상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제공한 서독과는 달리 일본은 헌법의 제약으로 소규모 자위대만 보유, 방위비를 절약하고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 덕분에 장기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일본이 산업 대국으로 浮上(부상)하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 때 한반도에서 싸우는 韓美(한미) 군대에 대한 보급 및 정비 기지로 이용된 덕분이다. 한국전은 NATO와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군사 원조를 세 배나 늘리게 했다. 한국전은 미국이 汎세계적 규모의 동맹과 군사원조 정책을 완성하고 지속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서 미국 국방부는 정책 수립의 주요 참여자가 되었으며 세계인들은 펜타곤을 미국 군사력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1953~54년 미국 방위비(원자력 에너지 및 기타 非국방부 예산 포함)는 연방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고, 병력은 두 배로 늘었으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관심으로 국민들은 무기한에 걸쳐 평화 시에도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뒷받침하였다.〉
  요약하면, 한국전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의 경제부흥, 서독의 재무장, NATO 강화, 한미동맹, 미군 倍增(배증), 해외주둔 강화 노선으로 對蘇(대소) 봉쇄망을 완성, 그 40년 뒤 소련을 무너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냉전 승리의 시작이 한국전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누가 영웅인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냉전)의 승리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그 역사 속에 영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국 등 해외 학자들은 미군 파병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를 외교 전략적으로 보좌한 딘 애치슨 국무장관,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중공군을 저지, 반격에 성공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 등을 영웅으로 꼽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은 높게 평가되지만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어이없는 誤判(오판)과 文民(문민) 대통령에 대한 抗命(항명)과 해임으로 종합적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한국은 예외). 한국군 장군으로는 다부동 전투의 영웅 白善燁(백선엽), 춘천을 3일간 방어하여 敵(적)의 전략을 흩뜨려 버린 金鍾五(김종오) 6사단장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누구보다도 한국전의 흐름을 주도한 두 최고 지도자는 이승만과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좌익들의 선동과 전쟁 중 피해를 본 이들의 반감, 그리고 전쟁의 본질에 대한 학자들의 無知(무지) 등이 결합된 때문이다.   
  한국군과 이승만은 북한 김일성의 기습을 받고도 衆寡不敵(중과부적) 상태를 무릅쓰고 총력전에 의한 결사항전을 이어 나갔다. 한국군은 후퇴는 했지만 항복하진 않았다. 부대 단위의 항복이 없었다(반면 북진 때 북한군은 조직이 와해되었다).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며칠간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초인적 집중력으로 전쟁 지도를 했다.   
  그는 6월25일 오전 10시, 남침상황을 보고 받은 직후,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경)를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 회동(11:35), 주미대사관에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회동(22:00이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이후)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실에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27일엔 주미대사관에 전화(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으로부터 피란 건의 접수(02:00), 경찰의 청량리 적(敵) 전차 진입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의 행적을 보였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등 전쟁 지도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다. 
    
  “종말에선 선이 악을 이긴다”  
 
  이승만은 6월25일 오전 경무대를 방문한 무초 대사에게 “즉 필요하다면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전쟁기간 한국은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全 국민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았던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남정옥 박사)  
  기습을 받은 한국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1940년의 프랑스군처럼 抗戰(항전) 의지를 포기하고 무너졌더라면 미군이 한국에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트루먼과 함께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한국전의 두 영웅이다.   
  이승만이 서둘러 서울을 떠난 점은 그가 포로가 되면 한국군의 저항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후퇴하는 군과 민간인들이 渡江(도강)하기 전에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은 군의 실책이었지 대통령이 책임질 수 없는, 전쟁에선 흔히 있는 실수일 뿐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 전 국방장관은 미군 파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理想(이상)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트루먼은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트루먼의 파병 결정에 대해 여러 가지 학문적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근본에 깔려 있었던 것은 그의 선한 마음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15일 건국 선포일 연설의 첫마디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민주주의가 더디지만 종말에 가서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비열한 기습 남침에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서 이긴 것이다. 

  국가이익을 넘어선 세계적 보편 가치 구현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19일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貴國(귀국)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해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면서 〈본인은 우리의 大義(대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당성(right)과 강력함(might)이 우리 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라고 예언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고, 〈이 전쟁은 남북한 대결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절대다수 韓民族(한민족)의 대결이다〉고 정의했다.   
  한국전 관련 외교 문서를 읽다가 보면 공산진영 지도자들은 술수만 논하는데 자유진영 지도자들은 大義를 항상 따지는 것이 대조적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겨울 맥아더의 오판으로 중공군의 개입이 이뤄지고 그들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총퇴각하면서 이산가족의 비극, 흥남철수, 그리고 서울이 다시 함락되는 위기를 만났을 때 다시 한 번 한국을 구한 사람이다. 맥아더와 영국이 한국 포기론을 꺼냈을 때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면서 이를 거부, 리지웨이의 반격을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휴전 회담 때 반공포로 처리 문제가 쟁점이 되자 자유의사를 무시한 무조건 송환을 거부한 이도 트루먼이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2년을 끌었고 이 기간 미군 戰死者는 2만을 넘었다. 트루먼은 한국인 반공포로를 위하여 自國의 젊은이를 희생시킨 것이다. 국가이익보다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안권을 더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이승만이 이런 미군 전사자에 대하여 '그들은 미국인으로 죽었지만 동시에 세계시민으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한국전이 구현한 고귀한 정신을 요약한 것이다.   

 통계는 말한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最下位圈(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달러로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고도성장과 균형발전을 겸했다
   
 세계은행이 1965~19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하위)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 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칠레를 빼고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19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국정)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下位 40%의 성장률이 전체 평균과 비슷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원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 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다른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N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 소득 下位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성이 강하여 南美式(남미식)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Liberal Authoritarian-자유지향적 권위주의 지도자
   
 富者(부자)나라가 아니면 民主(민주)국가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가 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 56%의 사망률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되지 않았던 李承晩 정부 시절에 왜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왜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을 부자나라로 만들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도 무리다. 
 양식 있는 학자들은 박정희나 이승만을 독재자라 부르지 않는다.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경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자유 지향적 권위주의적 지도자’, 즉 ‘Liberal Authoritarian’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승만은 6·25 전쟁 중에도 국회를 해산하지도 선거를 중단하지도 언론을 검열하지도 않았다. 민주주의를 시작한 지 3년째인 나라가 이 정도 하였다면 잘 한 것 아닌가? 朴正熙는 5·16과 10월 유신으로 두 차례 憲政(헌정)질서를 중단시켰지만 사후에 선거를 통하여 그 조치에 대한 追認(추인)을 받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朴正熙를 싫어하다가 존경하게 된 카터 선거 참모의 고백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성공모델을 만든 분이고 朴 대통령은 제도정비와 경제발전을 통해서 민주주의 국가가 작동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분이다. 
  민주주의는 외양이고 그 속은 안전, 복지, 자유이다. 朴 대통령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안전과 복지를 확보했으므로 3분의 2 민주주의를 이룬 것이다. 안전과 복지가 확보되면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게 된다. 朴 정권에 대항해서 그 자유를 요구했던 소위 민주화 세력은 3분의 1 민주주의를 한 셈이다. 
 朴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는 외국인의 평가를 나의 견해로 삼아 대신 소개한다. 윌리엄 H. 오버홀트가 1990년대에 쓴 《중국의 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반한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저자가 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개도국)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 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모택동)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트 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 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식으로 성공한 산업화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주한)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트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이라고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最惠國(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先行(선행)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포퓰리즘을 거부한 게 성공의 요인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有化(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넷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 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敵對(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외자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朴 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과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동시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국가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퀴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가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트 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등소평)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한 미국의 박정희 연구가는 세미나에서 한국의 편향된 학자들이 자신의 발표를 비판하자 이렇게 말하였다. 
 “저를 비난하지 마세요. 저는 팩트(fact)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굳이 공격하려면 팩트를 공격하세요.”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