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훈 國情院長 內定을 둘러싼 異例性과 이에 대한 憂慮

    이동복 /전 국회의원,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 5월10일 오후 3시 국회의사당에서 서둘러 거행된 문재인(文在寅) 19대 대통령의 약식 취임식에서는 2개의 ‘이례적 사건(?)’이 관심 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하나는 문 대통령이 이날 서둘러 발표한 4명의 새 정부 요직 명단에 이낙연 국무총리,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주영훈 청와대 경호실장과 함께 서훈 국가정보원(약칭 국정원) 원장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문제의 서훈 국정원 원장 내정자가 이날 사실상의 약식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정상회담과 국정원의 국내정치 사찰이라는 국정의 가장 민감한 사안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는 사실이다.

    문 대통령이 이날로 임기가 시작되는 문재인 정부의 요직 인사에서 국정원 원장을 가장 우선적으로 내정한 4명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그 사실 자체만 가지고도 그 정치적 함의(含意)를 놓고 많은 설왕설래의 대상이 될 만하다.
    무엇보다도, 문제의 국가정보원 원장 내정자가 2000년(김대중-김정일)과 2007년(노무현-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깊이 간여했을 뿐 아니라 이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2000년(박재규), 2002년(정세현), 2005년(정동영) 등 세 차례의 통일부장관 방북 시 이루어진 김정일과의 면담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당시)의 방북 준비를 위하여 비공개 방북한 김만복 국정원장(당시)의 김정일 면담 때도 빠짐없이 배석했던 문자 그대로 ‘남북정상회담 통(通)’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력의 소유자가 문재인 정부 요직 인선 중 최우선 내정자 4명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실현에 얼마나 비중 높은 중요도를 부여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 취임의 시점에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및 아베 일본수상과의 정상외교와 동열(同列)의 차원으로 희석시키는 어록(語錄)을 남겨 놓기는 했지만 “당선되면 미국을 방문하기에 앞서서 평양을 방문하겠다”고 했던 후보 시절 그의 발언을 다시 일깨워 주는 행보(行步)가 아닐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날 있었던 ‘이례적 사건’ 중 보다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이날의 대통령 취임식 직후 서훈 국정원 원장 내정자가 기자들 앞에 스스로의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약식 ‘회견’을 통하여 기자들에게 ‘남북정상회담’과 아울러 “국정원의 국내 정치 사찰” 문제 등에 관한 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장면이었다.

    우선, ‘은밀’과 ‘보안성’과 ‘비공개’가 기본적 행동강령이 되어 있는 ‘국정원’의 책임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킬 뿐 아니라, 더구나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아직 ‘내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국정 현안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언론에 피력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례적이다. 이 같은 일은 그의 전임자들은 물론 미국이나 영국, 독일, 일본 등 다른 선진 여러 나라의 국가정보기관의 책임자들 가운데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처신이다.

    국정원의 전신(前身)인 ‘중앙정보부’(중정)가 창설된 것은 1962년이니까 1980년에 ‘중정’ 직원이 된 서훈 씨에게는 생소한 일일지 모르지만 창설 당시 ‘중정’의 ‘부훈(部訓)’은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양(止揚)한다”는 것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들었었다. 여기서 ‘지양’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단어다. 이에 따르면, 창설 당시 ‘중정’은 ‘부훈’을 통하여 직원들에게 “신분을 감추고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을 것”을 요구했었다. 일단 ‘중정’ 직원의 신분을 취득했다면 “결코 출세(出世)를 추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경과하기도 전에 이 ‘부훈’이 둔갑(遁甲)하는 현상이 생겼다. ‘지양’이라는 단어가 엉뚱하게도 사실상 전혀 반대의 의미를 지닌 ‘지향(指向)’으로 바뀐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중정 직원’에게 요구되던 ‘은밀’과 ‘보안성’ 및 ‘비밀주의’의 행동 준칙은 이름 좋은 하늘 타리가 되었고 ‘중정’의 국내 분실 직원들은 지역 사회의 ‘유지’로서의 ‘신분’을 공공연하게 과시하면서 공개 활동을 탐닉(耽溺)하는가 하면 ‘중정’ 근무가 정·관계(政·官界)로의 고속 진출을 보장하는 출세 코스로 변모했다. 이 같은 국가정보기관의 변질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저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적폐(積弊)의 원천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문재인 정부의 출범을 알리는 대통령 취임식 언저리에서 발생한 국정원 원장 내정자의 이례적인 신분 현시(顯示)와 공개 언행을 보면서 필자는 서훈 내정자에게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양한다”는 ‘중정’의 창설 당시 ‘부훈’을 일깨워 주면서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진리를 음미해 보기를 권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와 함께, 필자는 서훈 내정자가 이날 기자들에게 ‘남북정상회담’에 관하여 언급한 데 대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아마도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갖는 특성이 초래한 현상이기는 하겠지만, 1970년대 초 초창기부터 대한민국 정부에서 남북대화를 ‘중정’이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는 동안 일관되게 이들 ‘국가정보기관’이 주도하는 일이 지속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1981년 국군 보안사령관 출신의 전두환 대통령이 ‘안기부’에 소속했던 ‘남북회담사무국’을 ‘국토통일부’ 소속으로의 편제 이동을 단행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통일부 주도'의 모양을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질적으로는 ‘안기부’에 이어 ‘국정원’이 주도하는 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의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남북대화 과정이 증언해 주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좌파’ 정권 아래서 남북관계가 밀월(蜜月)을 과시했던 시기에 특히 ‘남북정상회담’의 실무 책임자였던 사람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장으로 발탁된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는 뜻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오늘날의 남북 대치 상황 하에서 ‘국정원’이라는 최고국가정보기관의 입장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이 기관의 기본 임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지금의 상황 하에서 ‘국정원’의 불변의 기본임무는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불침번(不寢番)’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를 상대할 때 국가안보의 ‘불침번’ 임무와 남북대화, 그것도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임무 사이에는 국가의 존망(存亡)을 좌우할 정도로 상극(相克)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국정원’의 책임자가 ‘남북정상회담’의 신기루(蜃氣樓)를 쫓아다니느라고 국가안보의 ‘불침번’으로서의 기본임무를 소홀히 할 경우 국가 안위(安危)에 미치는 피해를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당사자인 국정원 원장까지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국가안보의 위기 상황 하에서는 국정원은 국가안보의 본연의 기본임무에 충실하게 하고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대화 문제는 국정원이 아닌 정부의 다른 기능에서 감당하게 하는 것이 올바른 국정관리 요령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적어도, 현재의 핵 위기 상황 속에서의 남북대화는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신기루’를 쫓을 것이 아니라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포기와 함께 북한 동포들의 절박한 인권 상황의 개선을 해결 대상으로 삼는 것에 주안을 둔 제한적인 성격의 대화라야 할 것임을 문 대통령이 인식하는 것이 긴요하다.

    이 같은 시각에서 필자는 1972년 5월 비밀리에 이루어진 평양 방문을 위하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당시)이 제출한 ‘특수지역 출장 허가 신청서’를 4월26일자로 재가(裁可)하면서 박정희 대통령(당시)이 이 신청서에 수려한 펜 글씨 체의 친필(親筆)로 적어서 내려 보내 주었던 ‘훈령(訓令)’ 내용을 아래에 옮겨 적어서 문 대통령과 그의 측근 참모들에게 일독(一讀)과 참고를 권하고자 한다.

    『북한 측 대표와 의견교환 시 취할 우리 측의 기본입장을 다음 과 같이 훈령함.

    <아 래>

    1. 남한 국세가 절대 우위라는 자신으로 대화에 임함으로써 북이 우위라는 환상적 기(氣)를 꺾고 평화통일을 위한 제 (諸)의견을 교환해 본다.

    2. 금번 여행에 있어서는 주로 상대방 요로의 사고방식 및 현재 북한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한다.

    3. 의견교환시의 상대방의 태도 등을 감안하여 필요하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명을 할 수 있다.


    <다 음>

    가. 조국의 통일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회담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

    나. 남북은 4반세기 동안 정치, 경제, 사회, 기타 분야에서 상호 상이한 제도 하에 놓여 있는 실정을 직시하고 통일 의 성취는 제반 문제의 단계적 해결을 통하여 궁극적인 평화통일 목표 달성을 도모하기로 한다.

    다. 따라서 우선 현재 시행중인 남북 간 적십자회담을 촉진시켜 가족 찾기 운동이라는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 을 보도록 하고 다음 단계로 경제, 문화 등 비정치적 문 제를 다루도록 하는 회담을 열기로 하며 최종 단계로 정 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남북한 정치회담을 갖기로 한 다.

    라. 이를 위하여 남북 간의 분위기를 가급적 호전시킴이 긴요함에 감(鑑)하여 남북 간의 대화와 접촉이 진행 또는 계속되고 있는 동안

    1) 비현실적인 일방적 통일방안의 대외선전적 제안을 지양하는 동시에

    2) 남북 간 상호 중상 및 비방은 대내외적으로 이를 지양하며

    3)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임을 막론하고 무력적 행동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처사는 일체 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이상의 아 측 견해에 대한 상대방의 견해 또는 주장 등에 관한 처리방법 등은 귀임 후 면밀한 검토를 거쳐 이를 마련하기로 한다. 

    1972. 4. 26 박 정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