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이승만史(1)-부산정치파동① 헌정체제의 결정: 내각책임제냐, 대통령중심제냐

    사상 최초 대통령직선제 ‘8.5선거’는 민주화 혁명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 ▲ 제66차 이승만 포럼에서 '부산정치파동'에 대하여 발표하는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2016.8.16. 정동제일교회)
    ▲ 제66차 이승만 포럼에서 '부산정치파동'에 대하여 발표하는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2016.8.16. 정동제일교회)

▶이 연재기사는 제66차 이승만 포럼(2016.8.16.)에서 요약 발표한 것을 풀어 쓴 것임.

연재를 시작하며

한민족 운명의 달 8월, 황제란 사람이 나라를 내준 8월 22일과 29일 국치일,
미국의 원자폭탄 덕분에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8월15일,
망한 땅에 새 나라 대한민국을 세운 8월15일 광복절은 우리 대부분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한민국을 지키고 번영시킨 한미동맹이 맺어진 8월 8일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역사적인 날 <8월5일 선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남아있을까?

107년만의 폭염(暴炎)에 전국이 불타는 8월이 가기 전에 ‘8.5선거혁명’을 이야기 하고 싶다.
8.5선거가 뭐야? 묻는 이에게 ‘부산 정치파동’ 하면 나이든 세대는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64년전 6.25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1952년 여름,
전쟁 중의 당쟁(黨爭) 부산정치파동 40여일만에
소위 ‘발췌개헌안’이 7월4일 통과되고
그에 따라 한달 후 8월5일 전국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 대통령 직접선거였고,
72% 득표로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5천년래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
  • ▲ 부산정치파동을 상징하는 사진. 1952년 5월26일 계엄사는 부산 임시국회에 등원하는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는 국회버스를 통째로 연행하였다.(자료사진)
    ▲ 부산정치파동을 상징하는 사진. 1952년 5월26일 계엄사는 부산 임시국회에 등원하는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는 국회버스를 통째로 연행하였다.(자료사진)

  • 1948년 선포된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 헌법엔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間選제)였으므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이 뽑은 간선 대통령이었다.
     그 4년후 치열한 개헌투쟁 끝에 ‘직선제 헌법’이 탄생함으로써
    국민이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8.5선거가 처음이다.

    그 선거가 왜 ‘혁명’이란 말인가?
    걸핏하면 ‘혁명’을 붙이려는 용어인플레 아닌가?
    그럼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유사이래 지독했던 전제주의 노예 체제를 청산한
    ‘공화국 건국혁명’에 이은 ‘민권 혁명’ 아닌가?
    국회의원이 돼야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간선제로는
     3천만 국민이 공화국 국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투표지에 ‘나의 선택’ 도장을 찍으면서
    그 국민의 손은 그 마음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혁명적 기쁨을 맛보며 주인됨을 깨닫지 않았을까.
  • ▲ 제헌헌법 사본(자료사진).
    ▲ 제헌헌법 사본(자료사진).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 공화주의가 사상 처음 명실공히 제도화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보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이 권력을 자기 것으로 찾아 행사하는 대한민국 국민,
    그들은 수천년동안 왕과 양반계급을 위해서만 생존해야 했던 백성들,
    대통령이 왕인 줄 알던 무지한 문맹인들,
    8.5선거로부터 비로소 민주주의 실습에 들어가면서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인간 혁명, 국민 혁명, 민주 혁명이라 할만하지 않은가. 
  • ▲ 김영삼 정권이 1995년 철거한 옛 중앙청 건물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1948.5.31)(자료사진).
    ▲ 김영삼 정권이 1995년 철거한 옛 중앙청 건물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1948.5.31)(자료사진).
  • 대한민국은 2차세계대전후 가장 빠른 기간에
    산업화-민주화 ‘기적의 신화’를 이룬 나라로 평가 받고 있다.
    그 민주화는 언제적 민주화인가?
    운동권이 자랑하는 80년대 데모사태인가?
    7080 기간에 반독재 투쟁하던 그들이 얻어낸 민주화는 
    전두환의 6.29선언이 회복한 ‘대통령 직선제’ 아니던가.
    그 민주화의 원형은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
     4.19후 돌고 돌아 운동권은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를 찾기 위해
     이승만-박정희를 그토록 매도하고 매장했던 것인가.

    이 혁명적 공화제의 실현-민주화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역설적이게도 부산정치파동이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정할 때 정당들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다가,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설득에 굴복한 후,
    건국내각에서 소외된 한국민주당(한민당) 등은 즉각
    8월15일 정부수립 전부터 개헌운동에 나선다.
    6.25전쟁 전날까지 내각제 개헌을 시도하던 한민당(민국당으로 확대개편)이
    피난수도 부산에서 또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승만 정부도 직선제 개헌안을 밀어붙여,
    전쟁하면서 이를 관철시켰던 사건이 ‘발췌개헌’ 파동이다.

    부산정치파동은 그 자료들을 지금 살펴봐도 ‘혁명’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정치 드라마다.
    만77세 노인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군과 싸우면서
    야당과 미국을 상대로 투쟁하는 과정은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한 무혈혁명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공산군과 전쟁하는 나라 대통령 이승만은
    왜 하필 그때 그런 싸움을 해야했던 것일까.
    적의 남침을 막아주는 전쟁의 ‘은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중에 미국과 왜 싸워야만 했던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조사해본 당시 자료들은 대강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주었다.
    첫째,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미국은 야당 대통령으로 바꾸려했다.
    둘째, 야당은 미국의 힘을 빌어 간선제 또는 내각제 개헌으로 정권을 잡으려 하였다.
    셋째, 이승만은 미국의 지배에 들어가려는 신생국의 독립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했다.
    넷째, 따라서 이승만은 평생신념인 직선제 리더십을 확립, 국민의 힘으로 막으려 했다.
    다섯째, 미국은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을 영구제거하는 군사작전을 준비하였다.
    여섯째, 전쟁 지도자 대안을 찾지 못한 미국은 결국 이승만에 굴복, 타협을 택하였다.
    일곱째, ‘독재자 이승만 규탄’을 외치던 야당은 미국이 양보하자 따라서 굴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내각제의 일부내용을 발췌하여 짬봉헌법을 만든 것이 파동의 골자다.
  • ▲ 6.25전쟁중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던 부산 경남도청 건물.(자료사진)
    ▲ 6.25전쟁중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던 부산 경남도청 건물.(자료사진)

  • 자료들만 대충 훑어봐도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동안 부산정치파동은 왜 ‘독재자 이승만의 장기집권음모‘라며
     ‘헌정유린 쿠데타’로만 규정되어 왔던가.
    정치학자란 사람들은 모두 ‘외눈 박이’들이란 말인가.

    3.15 부정선거후 4.19 의거로 무너진 자유당 정권,
    이승만 집권 12년간 반정부투쟁으로 일관했던 정계, 지식인들, 언론계는
    이승만이 자진 사퇴후 한국을 떠나자 그에 대한 비난은 봇물처럼 쏟아냈고
    원색적인 ‘저주’까지 넘치고 넘쳐 수십년간 이땅에 정설로 굳어지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월간지 ‘사상계’의 장준하(張俊河)는
    “이승만은 인간이하의 악한(惡漢)” “희대의 천재적 협잡꾼”등 욕설로 성토하였고.
     논객 신상초(申相楚)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철저한 에고이스트”로 매도,
    언론인 송건호(宋建鎬)는 “독립운동도 제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했고
    건국도 제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했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등 힘 센 언론의 이승만 난도질 앞에서
    어느 누가 감히 이승만의 실체를 조사하고 연구할 엄두를 낼 수 있으랴.
    부산정치파동을 연구했다는 논문들이나 책들은
     안타깝게도 ‘독재자 결론’에 짜맞추기식 서술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그 파동을 ‘5.26파동’이라고도 부른다.
    왜냐하면 5월25일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의원들을 연행한 날이 26일이니까.
    눈높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국회의원 연행’만이 역사연구의 초점이란 말인가.
    “국회를 무시하고 국회의원들을 연금했으니 독재자”라는 단순논리로 단정해버린 왜곡은,
    마치 9.28 서울수복 후 동아일보가 “혼자 도망간 대통령” “시민 다 죽인 한강교 폭파”를
    열거하며 ‘이승만의 죄’를 추궁하던 일방적 보도와 너무나 닮아 보인다.
    전쟁을 전쟁으로 보지 못하고 정쟁(政爭)의 먹이만 찾던 눈병(眼疾),
    임진왜란 때 잘 싸우는 이순신을 잡아다 벌주는 고질병의 DNA는
    일본 식민주의 강자에겐 욕설 한마디 못하다가
    제나라가 생기자 그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
    대한민국 건국사요, 부산 정치파동이요,
    건국이래 오늘에 이르는 한국 정당정치의 뒤안길 흙탕물이다.
    지금도 국회는 북한이나 중국 앞에선 할말을 못하고 있잖은가.
    그러면서 또 무슨 목적인지 모를 개헌론을 저마다 내놓고 있다.
  • ▲ 6.25전쟁중 임시 경무대였던 경남 도지사 관사. 지금은 임시수도 기념관(자료사진)
    ▲ 6.25전쟁중 임시 경무대였던 경남 도지사 관사. 지금은 임시수도 기념관(자료사진)

  • 이 연재기사는 결코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편들자는 목적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눈부신 현대사를 일궈낸 역사의 힘,
    파묻힌 진실의 뿌리라도 캐어 보고 싶을 뿐이다.
    50년경력 신문기자인 필자는 우선 당시 신문들이 보고 싶었다.
    건국시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면들을 찾아보면서,
    한편 파동관련 논문들과 책들을 읽어 보았다.
    하나같이 독재자의 국회탄압 이야기, 이승만의 언행은 모두 ‘독재’ 먹칠이다.
    역사가 각색되는 역사 편집, 참 희한한 현대사기록의 만화경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그 전모를 구경할 수 있을까.
    사상최초 개헌파동의 발화점(發火點)은 제헌국회(制憲國會)다.
    건국정부가 8월15일 출범식을 하기 전부터 
    “개헌하라. 개각하라” 들고 일어났던 건국정치판,
    그 현장으로 먼 길을 출발해보자.
    68년전 타임캡슐로 부웅!!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