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서청원·홍문종 출마 불발에 따른 親朴 '전략적 투표'도 勝因
  • "솔직히 이정현 의원이 (당대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세요?"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권에 도전한다고 하고 있을 때, 당선 가능성을 묻자 한 새누리당 의원실 관계자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건넨 말이다.

    또다른 의원실 관계자는 "더불어(민주당) 식으로 호남 대의원·책임당원 표에 수십 배를 얹어주지 않는 이상 이정현 당선은 불가능"이라고 잘라말했다.

    구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난해 2·8 전당대회에서 호남에는 권리당원 63명당 대의원 1명을 배정하고, 영남에는 권리당원 3.3명당 대의원 1명을 배정하는 형태로 호남을 차별했던 것에 빗대, 이렇게 20배 가까이 차이나는 방식으로 비호남을 '역차별'하지 않고서는 '여권의 불모지' 호남에서 당대표가 나올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 ▲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9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직후 꽃다발을 받은 채로 양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9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직후 꽃다발을 받은 채로 양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전남 당연직 대의원 제주보다 적어… 그야말로 '기적의 질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9일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이정현 의원은 당당히 대표로 선출됐다. 앞서 언급된 어떠한 '꼼수'도 없었다.

    그의 연고지 호남(광주·전남·전북)의 책임당원 선거인단 수는 9004명으로 전체 선거인단 33만7375명의 2.7%에 불과했다. 실제 투표 1741표는 전체 투표 수 6만9817표의 2.5%로 오히려 더 비중이 낮아졌다.

    이날 잠실실내체육관에서 현장투표를 한 대의원에도 어떠한 배려도 없었다. 호남의 대의원은 600명으로 전체 대의원 9135명의 6.6%였다. 광주광역시의 당연직 대의원은 15명으로 세종시(28명)의 절반 수준이고, 이정현 의원의 지역구가 있는 전라남도의 당연직 대의원은 34명으로 제주도(51명)보다도 적었다.

    그런데도 이정현 의원은 승리했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을 이뤄냈다. '기적의 질주'라고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친박 핵심' 자체 주자 불발된 것 유리하게 작용

    당권 경쟁 과정에서 제반 여건이 유리하게 돌아갔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당초 '친박 핵심'은 최경환 의원의 당대표 출마를 검토했다. '총선 패배 책임론'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서청원 의원의 당대표 출마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정치적 사정으로 이것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워졌다. 서청원 의원이 20대 후반기 국회의장을 겨냥하기로 정치적 진로를 바꾸자, 그 다음에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 이어 홍문종 의원 '출마 카드'가 물망에 올랐으나 모두 불발에 그쳤다.

    이렇게 '친박 핵심'이 자체 주자를 내세우는데 실패하자 비로소 '아웃사이더'인 이정현 의원이 선택지에 오르게 됐다.

  • ▲ 이른바 2단계 비박 단일화를 단행한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과 정병국 의원이 단일화가 결행된 지난 5일 단일화 발표 시점을 논의하던 중 손목을 들어 동시에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이른바 2단계 비박 단일화를 단행한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과 정병국 의원이 단일화가 결행된 지난 5일 단일화 발표 시점을 논의하던 중 손목을 들어 동시에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비박 '단일화' 방아쇠 당겨 되레 친박 '전략적 투표' 자극

    '비박 2단계 단일화'도 오히려 이정현 의원에게는 도움이 됐다. 우선 '비박 단일화'와, 이를 물밑에서 압박한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의 움직임 자체가 친박계를 자극해 이들이 결속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비박 2단계 단일화' 결과 주호영 의원이 정병국 의원을 누르고 단일 후보가 된 것도 행운으로 작용했다.

    당시 친박계의 중론은 이정현 의원을 지원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나, 일각에서는 "정병국 의원으로 비박 후보가 단일화돼, 이주영 의원이 '영남권 유일 후보'가 되면 승산이 더 높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뜻밖에 정병국 의원이 낙마하고 주호영 의원이 '비박 단일후보'가 되면서 영남권 표가 TK와 PK로 양분되게 됐다.

    이후로 친박계가 이정현 의원에게 '전략적 투표'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는 게 친박계 핵심 중진 의원의 전언이다.

    ◆하늘이 스스로 돕는 이정현 도왔을 뿐

    하지만 결국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정현 의원 스스로가 당대표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와 실력,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많은 행운이 쏟아지더라도 도움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 그대로다.

    이정현 의원은 4·13 총선 때부터 "이번에 당선되면 집권여당의 당대표에 도전하겠다"고 지역구인 순천시민들에게 공언했다. 당시에는 '전라도 사람'이 과연 새누리당 대표가 될 수 있을지 순천시민들도 긴가민가했지만 그는 결국 지역구민들의 선택을 받고야 말았다.

    그리고나서는 바로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총선이 끝나고 지역구 당선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배낭 하나를 둘러메고 곧바로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당권 운동이라고 해도 국회의원을 만나는 것도, 당협위원장·자치단체장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났다.

    보육이 문제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가까운 가정어린이집을 검색해 불쑥 찾아들어간 적도 있었고, 조선산업 구조조정이 문제라고 하면 거제·통영으로 훌쩍 가서 하청·재하청 업체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석 달 넘게 계속된 그의 진정성 있는 행보는 마침내 책임당원과 대의원들의 표심마저 움직였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대로, 캠프도 차리지 않고 조직도 동원하지 않은 채 정치권 일반의 시각에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거운동을 전개한 것이 되레 크나큰 결실을 거둔 셈이다.

  • ▲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지난달 21일 의원회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컨텐츠와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의원회관 한편에 배낭 토크에 나서기 위한 배낭과 밀짚모자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지난달 21일 의원회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컨텐츠와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의원회관 한편에 배낭 토크에 나서기 위한 배낭과 밀짚모자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독보적 컨텐츠와 무궁무진한 비전으로 차별화

    그런데 컨텐츠 없이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해줄 말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정현 의원은 독보적인 수준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왔다. 이번 8·9 전당대회 당권 경쟁 과정에서 네 차례 방송을 탄 TV토론을 보면 컨텐츠의 측면에서는 누가 봐도 이정현 의원이 발군이었다.

    "야당의 시각으로 경청하고 여당의 책임감으로 풀어내겠다"는 민생 해법부터 시작해서, 당권 레이스의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당청(黨靑) 관계를 여당의 이중적 지위, 즉 '여권의 일부로서의 지위'와 '입법부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라는 점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 또한 논리적이었다.

    나아가 대선 후보 경선을 슈퍼스타K(슈스케) 방식으로 치르겠다는 것 또한 차기 정치지도자는 일만 묵묵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국민에게 그 '일'의 내용을 논리적인 '말'의 형태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장착할 수 있는 컨텐츠였다.

    이처럼 무궁무진한 컨텐츠를 갖고 있는 이정현 의원으로서는 입만 열면 계파 싸움 문제로 지새우는 TV토론에 답답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서 열린 당대표 후보자 TV토론에서 이정현 의원은 "귀중한 전파를 당내 계파 이야기로만 다 허비하고 있으니 이 토론을 보고 있는 국민들이 한숨을 쉬지 않겠느냐"며 "비전이 저리도 없는지 한탄할 것"이라고 일갈했던 적도 있다.

    ◆"서러웠던" 시절 끝내고 펼칠 '보은의 정치' 기대

    1~4차에 걸친 합동연설회와 이날 전당대회장에서 방영했던 후보자 소개 동영상에서도 언급됐듯이 "새누리당에서는 호남 출신이어서, 호남에서는 새누리당 출신이어서 지난 세월이 서러웠던" 이정현 의원.

    "이제 여러분이 내 손 한 번만 잡아달라"는 호소대로 당원과 국민들은 '준비된' 이정현 의원을 새누리당의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했다. 스스로의 준비된 컨텐츠와 함께 담대했던 당권 출정의 과정, 거기에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듯한 여건 조성까지 겹치면서 그는 마침내 사무처 간사병(丙)으로부터 열 일곱 계단을 뛰어올라 당대표가 됐다.

    "꼭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공언했던 이정현 대표는 앞으로 자신을 선택해준 당원과 국민들에게 어떤 보은의 정치를 펼칠까. 확실한 것은 그 스스로 이번 당권 레이스 과정에서 보여줬던 담대함과 진정성의 초심(初心)을 잃지 않는 한, 하늘은 계속해서 '스스로 돕는' 이정현 대표를 도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